[선진문학뉴스]감성취재 - 쌍매당 이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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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문학뉴스]감성취재 - 쌍매당 이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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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

​[문학과 역사 고찰]


쌍매당 이첨 편 "이첨의 문학과 인생"

이첨(李詹 1345-1405) 호는 쌍매당(雙梅堂).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자는 중숙(中叔),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이첨의 할아버지는 보분각제학 이달존(達尊)이고,
아버지는 증 참찬의정부사 이희상(熙祥)이다.

이첨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1365년(공민왕14) 21세에 감시의 제 2인으로 합격.
1368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이 되고, 이듬해 우정언에 이어
1371년 지통사로 권농방어사를 겸하였다
1375년(우왕1)우헌납에 올랐으나  권력을 남용하던 권신 이인임, 지윤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1388년 유배에서 풀려나 내부부령 예문응교를 거쳐 우상시가 되었으며
1391년(공양왕3)좌대언이 되었다. 이어 지신사에 올라 감사를 맡았으나,
이 해에 장류된 김진양 사건에 연류되어 결성(지금의 충남 홍성)에 다시 유배 되었다.
그후로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등용되어 동지충추원학사에 올랐다.
1400년 (정종2) 첨서 삼군부사로 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지의정부사에 올라 하륜과 함께 등극사의 부사로서 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태종 2)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대사헌을 겸했으며,
1403년에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하륜 등과 함께<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했고,
저서에 소설 <저생전(楮生傳)>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많은 시를 남기며, 유저로는, <쌍매당집(雙梅堂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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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생전)) 소개

"저생전"은 고려 말기, 이첨(李詹)이 지은 가전체(假傳體) 소설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첨(李詹.1345∼1405)이 종이를 의인화해서 지은
가전체(假傳體) 소설. <동문선> 제 101권에 실려 있다.
종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작자의 자서전식으로 써 나갔는데,
근시(近侍)와 정객(政客)들의 직간(直諫)을 주제로 하여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하는 교훈이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당시의 부패한 선비의 도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고 잇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작품의 끝 부분 "왕자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에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첨, 급암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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諂諛從來易得親
아첨하는 무리들이 예로부터 쉽게 총애를 얻는다는 것을
 
君看大將與平津
그대는 대장인 위청과 평진후인 공손후에게서 볼 수 있네.
 
高才久屈淮陽郡
높은 재주임에도 회양군에서 오래도록 구부렸으니,

孰謂當時社稷臣
누가 당시 사직의 신하라 하였던가?


 

「詠汲黯」 시는 사회풍자 詩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재밌는 점은 아양을 떠는 신하들만을 비판한 게 아니라,
그런 신하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임금까지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구를 통해 임금에 대한 비판이 가열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냐면, 급암을 ‘사직의 신하’라 띄워준 게 바로 무제였기 때문이고,
겉으론 사직의 신하라 띄워줬지만 막상 현실에선 회양군으로 좌천한 후에 무려 10년 동안이나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시는 무제라는 임금에게까지 비판의 칼날을 확실히 세운, 그래서 고려 조정의 아첨꾼들과
임금에게까지 비판의 칼날을 세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쌍매당 협장집)) 소개

쌍매당 협장집은 아들 소축(少畜)이 세종 때에 편집, 간행하였는데, 원본은 극히 희귀하며
그 중 일부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쌍매당집은 일부 분실되어 현재는
필사본인 1·2권과 목판본인 22~25권 등 모두 6권 3책만 전한다.
권1·2에는 그가 1402년(태종 2)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에 지은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권22∼25에 수록된 글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즉, 잡저에 실린 『삼국사』의 서문과 그의 사론을 통해 사학 사상을 유추할 수 있으며,
계문을 통해 당시 그가 참여한 계의 성격과 조직·목적 등을 알 수 있다.
권24의 「제망자문(祭亡姉文)」은 『고려사』 열전과 연보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장척명 (長尺銘)

       이첨

너의 편명함이여
내가 형을 삼는다
너의 곧은 것은
내가 본받아 덕을 삼는다
  
물건도 편평하고 곧은데
사람으로서 어찌 굽힐 것인가
물건을 보고 내 몸에 반성하면
덕이 천지나 같으리라.


이첨은 성품이 강직하며, 점잖으면서 너그럽고, 여러 가지 학문에 통달한 인물로
평생을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첨이 사망한후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이첨에게 관곽을 내렸으며,
나라의 힘든일을 접할때 이첨을 많이 그리워 했다고 한다.
쌍매당 이첨 선생은 고려 충목왕 때부터 조선 태종까지 9명의 왕조가 바뀌는
격동시기에 세찬 풍파를 거치며 검출한 문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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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매당 이첨선생의 묘

                                             


                                                          

                                                              - 취재 이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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