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문화인가 네포티즘인가?/ 김영미

이 시대 진정한 휴머니즘을 전하는 문학뉴스가 되겠습니다.
김영미 문학평론

서브문화인가 네포티즘인가?/ 김영미

선진문학뉴스 0 272 0

461e987cdc2c18a3867fdecea2f69d34_1688531846_18.jpg
e0e245145e091fd6d8d949e7dff44569_1702660645_53.jpg
 


서브문화인가 네포티즘인가?


 시인 문학평론가 김영미



우리가 사는 인간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다. 삶 속에서 인간의 내적 체험과 무의식에서 역사적 깊이에서 실존적 깊이를 동시에 길어 올릴 수 있는 기표와 기의로 시의 사유에 있어, 화자만이 가진 고유한 언어인 원형이 되는 상징물을 통해 미학적, 상징적, 초현실적, 시의 세계를 열어가는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혹은 실존주의에 있다고 본다. 시는 예술의 현상학이 한 예로 볼 수 있다.


예술 현상학인 동시에 미학인 동시대를 잇는 것이자 세대를 잇는 것이다. 언제서부터 인지 아니 1980년대를 기준으로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90년대의 경계에서 한 세대에서 또 하나를 세대를 이었다.


이 시대의 시와 시인들은 대중성을 쫓지 않았다. 지식인으로서 군부독재를 향한 외침과 사회의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한 부조리를 향한 부르주아를 외쳤다. 군부독재가 끝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체주의 시대, 탈 시인의 시대, 탈 시의 시대, 탈 문학의 시대, 탈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다.

또한 21c 접어들면서 대중매체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의 시선과 사유 역시 달라졌다.


오늘날의 문학은 1+1=2인 닫힌 텍스트의 시대가 아니다. 답은 5도 될 수 있으며 10도 15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간과한다면 50년 후 100년 후 살아남을 수 있는 문학(시)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시(문학)란 것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생태 시를 사랑 시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남대문시장의 노점상에 전을 펼쳐두고 골라 골라 하는 난전에 싸구려 물건을 사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21c 접어들면서 좀 더 세밀히 말하자면 80년대를 기준으로 90년대부터 산문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다양한 시 창작 기법들이 나왔다. 2020년을 분깃으로 주체이동, 행간걸침, 고정시점, 영상조립시점, 묘사, 등 다양한 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어떤 하나의 독창적 문화가 자리매김할 땐 동시대를 사는 우리의 문화에도 그 사회 내부에 독자적 특질과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문화의 동태성과 활력성을 줄 수 있다. 이로 기인한 문화의 활력성은 독자성을 지배해 지배문화 대중문화로 서브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런 서브 문화는 문학의 뉴 웨이브가 될 수 있다. 대중성을 통한 대중문화의 범주에 들면서 흥미성과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 서브문화는 그 문화를 옹호하는 이들로 한 사회의 그들만의 목소리와 태도를 가진 또 하나의 네포티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서브분화가 문학의 주체성과 시를 쓰는 시인의 기능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문화를 통해 좌파문화와 하위문화를 비평하자는 것은 아니다. 문학(시)은 철 지난 옷처럼 유행가 가사처럼 유행을 돌고 도는 유행의 문화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시를 문학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글을 쓰기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가 독자이기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다. 글이란 화자의 심상을 글이란 매개체를 통해 투영하는 것이자, 거기에 의미 뜻이 담기게 된다. 기의가 아닌 기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뜻을 그 의미를 상상계와 상징계를 넘어 초월한 실재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라캉은 상징계와 상징계를 넘어 초월적 실재계를 이야기했다. 또한 현상학에서는 화가의 도화지에 그려진 나무도 존재해 있으며 산이나 가로수에 난 나무도 실체 해 있다. 이것은 이분법이라 볼 수 있지만, 실은 실재와 본질이며 본질이 곧 실재인 현상학의 하나로 더 나은 것을 지향해 가는 것이다.
더 나은 세계 초월의 세계를 지향해 가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체로 실재하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가령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도화지에 나무(기표)는 존재한다. 저 바깥 가로수와 산에도 나무는 이미 존재해 있다. 화가는 나무를 열 번 스무 번 아니 300번 수천수만 번을 그릴 수 있다. 상상계 상징계를 초월한 실재계 그것은 우리가 기표가 아닌 기의(기표 기의는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를 중시하는 언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심연에 남아있는 기의 즉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기표 본질을 찾는 것이다. 즉 인간은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의 나무라는 명사는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일본에서도 모두 같은 언어로 통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표의 본질을 기의를 의미를 찾아 더 나은 곳으로, 더 고차원적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인간애를 고찰해 나아가는 지향성으로, 상상계와 상징계를 통한 실재계의 초월적 의미 우리가 지향해 가는 삶의 지향성이자, 본질이면서 진리인 바로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材靈김영미 시인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시낭송가

시.해.소(시와 해설이 있는 인문학 창작소 운영)

필명 건율(建聿)

저서 『남쪽 바다에 가고 싶다』 『소금꽃』 『현가주연』 『연우』 외 다수




#김영미시인
#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생의고별의순간까지글을쓰고싶은사람
#시.해.소
#시와해설이있는인문학창작소
#칼럼 




0 Comments
Cate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