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사유에 있어 행과 연이 주는 묘미
시의 사유에 있어 행과 연이 주는 묘미
시의 사유에 있어 행과 연이 주는 묘미
김영미 평론가
언어는 우리의 정신세계로 사람마다 지닌 특성이면서 화자의 성향과 인성 자라온 환경(등)을 엿볼 수 있는데, 언어에는 각 사람마다 지닌 고유한 감성이라는 것이 있다. 시에 있어 언어의 사유는 인간의 무의에서 유의로 사물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와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로 나뉘어 나타낼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시의 사유라 볼 수 있다. 시의 사유는 그 사유에 있어 근본인 사물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 시의 사유에 있어 언어가 주는 묘미인 운율을 벗어나서는 시의 본질을 논할 수 없다. 시에 있어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에 있어 운율이 없다면 살아있는 시로 볼 수 없다.
언어의 주체가 정신 세계에서 나오는 무의 이면서 유의인 동시에 사물에 대한 화자가 바라보는 관조[觀照]에 있어 시가 주는 사유는 시에 대한 소리로 감각적 이미지로 청각 후각 시각 촉각 공감각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인 시의 가락인 운율을 음률에 맞추어 전달하게 된다. 이 운율에 나타난 음률은 청자로 하여금 시가 가지는 묘미와 서정성을 가지게 한다. 언어의 본질인 시의 사유(운율, 행, 연)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시의 저변 확대를 위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시의 주류가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시에 있어 운율은 시의 전달력에 있어 외재율에서는 자유로워질 수 있으나, 내재율이 없는 시는 죽은 시나 다름없다고 본다. 시에는 화자의 분노, 생의 보람, 희망, 좌절,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담겨 시를 통해 보는 언어의 시각적 효과와 문자 언어가 가진 동적 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영상미를 가지는 문자 언어의 또 다른 매체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시에 있어 시가 주는 언어의 사유는 나침반과 같은 것으로, 세상과의 소통 자연과 사람 사이의 동질성을 형성해 주며 사람과 세상 자연과 물질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무형 색의 언어를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에 있다. 시에 있어 형상화는 화자의 정신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시는 시인의 언어이다. 시에 있어 시를 바라보며 대하는 화자의 태도로, 시어에 있어 주체가 되고 그 주체를 통해 시의 내 연적이면서 외면적인 면을 함께 아우르는 것으로 시에 대한 서정성이 내포되는 것이며, 시에 있어 작품의 효용론과 가치론을 가지게 하는 장치가 된다.
시에 있어 사유는 삶이 언어가 되고 삶이 시어가 되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시는 시의 흉곽에 있어 애달픔을 바라보는 시어가 시작[詩作]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지성인의 감성이 느끼는 이지애(理智愛) 적 정신에 있는 것으로 화자의 내면의 감성 세계를 객관화시켜 독자에게 지식의 언어로 표현하는 지성적 이지애(理智愛)의 행위이다. 물론 타인을 위해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너무 난해하거나 현학적으로 쓰여 진다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보여주기 식 글이 될 수도 있다. 이지애(理智愛)에 있어 지성적 통찰 정신과 감성적 성찰 정신의 애상적[哀傷的] 도덕 정신을 합한 것으로, 시가 화자에게 감화를 줄 수 없다면 작품이라 볼 수 없다.
현상학[現象學]에 있어 시는 나타남을 위한 조건으로 규정하지 않지만, 체험 안에서의 느낌과 앎의 수용성을 의미화하는 지성인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으로 이룬 느낌이나 지혜를 남에게 내보임으로서 자기 내면의 감성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지성적 이지애(理智愛)의 행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도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시는 일상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경계도 시인에게는 무의미하다. 화자 즉 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감성 인시의 창조가 생명력을 집어넣고 시의 운율을 지니게 됨으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훌륭한 불멸[不滅]의 시작[詩作]을 탄생하게 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하여 시의 창작에 있어 음률 리듬감을 지키지 못한다면, 시의 경계나 범주가 모호해진다.
물론 시의 범주에 있어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돋보일 수는 있으나, 아무리 좋은 문장과 글이라 할지라도 교감할 수 없는 문장은 죽은 글이다. 시인의 시는 구체적인 사물과 삶을 노래하므로 절대가치를 가진 시가 된다. 시에 있어 다양한 가치관과 시의 저변 확대를 위해 실험적인 운문시의 형태도 필요하겠지만, 시인의 시에 있어 내적 리듬과 외적 리듬이 없다면, 띄어쓰기 문장의 부호 호흡 템포(등) 산문과 시의 경계가 발현되는 시의 운율에 있어 내재율이 가지는 시의 묘미를 나타낼 수 없다. 시의 사유에 있어 시인은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언어관이 되는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타포[metaphor]에 있어 시의 예술성은 은유적 언어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가 이렇게 모호해진 데에는 우리 시인들의 책임이 있다.
시가 난해하거나 현학적이거나 한자를 많이 쓰거나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쫓아 글을 쓴다면 유행가 가사처럼 철지 난 음반처럼 대중성을 지향하게 되면 오래 남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글이 너무 가벼우며 순간적 착시현상처럼 글이 쉽게 눈에 들어오게 된다. 시 속에 평생을 걸쳐 체현한 도학적 사유가 시경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타포[metaphor]의 예술성을 시에 형상화하기까지는 우리 시인들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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