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현대사회 인간 내면의 욕망은 궁극적 차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인 인향만리(人香萬里)가 되어야 한다.
탈 현대사회 인간 내면의 욕망은 궁극적 차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인 인향만리(人香萬里)가 되어야 한다.
김영미(시인.문학평론가)
인간의 삶은 고민과 번민 고통의 연속성에 있다. 오늘날은 탈 인간의 시대, 탈 이데올로기의 시대, 탈 현대사회라고도 한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 성과로 인해, 인간의 삶은 매우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으며, 편리해졌다. 그러나, 왜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사회나 정치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삶을 존속 유지해 왔던, 지침이나 규칙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개개인의 이해관계나 처한 상황은 오히려 적절하게 대처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권력을 향한 욕망은 삶의 고통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구성원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욕망에 의한 수많은 모순을 배출해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좀처럼 만족이란 이룰 수 없는 신기루에 정착해 있는 듯 보인다. 그로 인한 낮은 자존감과 상실로 이어져 자의 던 타의 던 스스로 욕망이란 늪에 옭아매어지기도 한다. 어느 시인(들)은 등단을 한 그날로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가 하면, 등단한 지 1년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수필과 평론의 등단까지 원스톱이다 못해 시집을 2권 3권씩 내는가 하면, 어디서 그런 상이 다 생겼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그럼, 시집 발간을 하지 말란 의미인가! 좀 더 숙성되고 익어져서 해도 충분히 늦지 않다는 거다. 대게 시집을 출간하고 1년 2년 혹은 1년 안에 후회하는 시인들도 많이 보았다.
자칫 어린아이에게 칼자루를 잘못 쥐어주게 되면, 잘못 휘두른 펜의 서슬은 살인(죽음)의 서슬이 될 수도 있다. 필자 또한 평론을 쓰지만, 기사나 평론, 발문을 쓰는 데 있어,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뱉어진 말은 도로 주어 담을 수 없지만, 쓴 글 역시 도로 주어 담을 수 없다. 글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 속엔 화자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화자가 가진 가치관과 도덕성 인성,(등) 모든 면이 다
담기게 된다. 오늘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문학사처럼 그 반열에 함께 해 상을 주며 등단을 시켜주고, 책을 내도록 추천해 준다면, 우리가 우리의 살을 깎아 먹는 꼴이 된다. 속칭 글쟁이 “뭐 요즘 문학사는 돈 버는 곳이지 뭐 개나 소나 다 등단시켜 주잖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시인이 설 자리는 없게 된다.
≪논어≫ 헌 문 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되어있다.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 의 서문에서는 “나의 참다운 삶의 길을 위해 성현을 알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공부하는 것” 이라고 자신의 학문적 성격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출세와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메탈리즘(materialism)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가 쓴 글들은 저 많은 책(시. 계간지) 속에 끼어져 나오는 홍보용 전단지와 다를 바 없는 글이 되어, 나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글을 쓰는 데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식이나,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만은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기교와 수사법만을 이용해 글을 쓰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지 않던가! 글은 단순히 쓰는 것이며, 글자나 문자가 아니다. 글 속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해 나가는 삶의 고뇌와 번민에서 벗어나, 사람의 됨됨이가 담기게 된다.
우리의 글 속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에서 인향만리(人香萬里)가 담긴 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인 문인의 글이 담겨야 할 것이다.